옛날 영도 곳곳에는 지형적 특성상 자갈이 많았다. 자갈이 싸여 있는 무더기를 사람들은 '자갈만뎅이' 또는 '자갈만대이'라 불렀다. 특히, 고유명사로 된 지명으로서의 '자갈 만대이'는 현 영선동, 남항동 일대의 바닷가와 대평동 옛 수산진흥원 자리를 가리킨다.
영도다리 옆 보세창고 부근 일대 지역으로서, 이 곳은 지형이 천연적으로 만(灣)을 이루고 있어 어선 등이 풍랑을 피하기 위해 대피하는 포구(浦口)의 구실을 하였다. 이러한 연유(緣由)에서 대풍포(待風捕)라고 하는 지명이 유래하였다.
옛날 바람을 피하던 갯가였다고 하는 데서 '태풍개'라고 하는 지명이 유래하였다. 또한 이 곳은 바람이 잔잔하게 잠들 때까지 피하여 기다리던 포구라는 뜻에서 '대풍포(待風捕)'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구 대평동(현 남항동)과 그 바닷가는 태풍개를 매운 곳이다.
이 지역의 파도가 잔잔하여 순하다는 뜻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 곳은 물살이 세어 나무로 만든 배가 지나갈 때는 다리에 부딪혀 부서지는 경우가 있었다 한다. 영도다리 중구쪽 입구 자갈치 선박 정박지 부근이다.
옛날 영도나룻배를 띄웠던 곳으로서, 이 곳은 영도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부산 시내쪽 뭍과 영도 섬 사이를 잇는 유일한 교통편인 나룻배의 물목이었다. 옛 부산시 청사가 있던 용미산에서 영도 쪽 갯가를 바라볼 때 그 동쪽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밑의 물목을 '동바위목'이라 일컬었다. 현 남항동 영도대교 아래쪽(영도쪽)을 이렇게 불렀다.
한자로는 '일지곡(一之谷)'으로 표기한다. 이 지명은 한자가 갖는 의미인 '큰 골짜기'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한지골'이라는 원 지명이 구전되면서 '함지골'로 바뀌었는데, 그 것은 높은 곳에서 볼 때 이 지대가 함몰되어 있다고 하는 데서 '함몰된 땅의 산골짜기'를 줄여서 이렇게 불렀다는 설도 있다. 약 40년전 건설교통부에서 조사할 때 이 곳 지명을 ‘함지골’로 정한 이래 그 이름이 공식 지명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선동 뒷산 골짜기 주변 일대를 '함지골'이라 부른다.
영선2동에 있던 마을로 이 곳에 성이나 성과 비슷한 물체가 있었거나, 성을 쌓는 일과 관련된 설화가 구전되어 오던 중 '성말축(城發築)'이라고 하는 마을 이름이 생긴 것으로 추리되기는 하지만 분명치 않다. 이 곳은 '성발차마을', '성발추마을', 또는 '성발치'라 불려지기고 한다. 현 영선2동이 이렇게 불렸다.
한진중공업이 들어서기 이전 봉래동과 청학동 사이는 얕은 여울바다였다. 매립되기전 이 곳 일대의 바다는 수심이 얕은데다 너비가 좁아 조류가 세차게 흘렀다 한다. 물살이 세차게 흐르는 여울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 곳의 지명이 '매강추'이다. 이 일대 바다에는 '매강추 어장'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 어장에서는 고기가 많이 잡혔다 한다. 봉래동 한진중공업이 자리 잡은 지역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 ‘매강추’이다.
봉래동 영도다리 동쪽에 있던 마을을 '나릿가마을'이라 불렀다. '나릿가'란 진변(津邊)이라는 뜻을 가진 나루, 도는 나루터의 가라고 하는 낱말의 사투리성 변형으로서 '나릿가마을'은 나루터 변두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으며, 이 곳은 또한 '진변마을'이라고도 불렸다. 지명이 시사하듯 1934년 영도대교가 가설되기 이전 이 곳에는 1890년부터 영도 섬과 부산 내륙 중구 지역 양안(兩岸)을 연결하는 나룻배가 닿는 나루터가 있었는데, '나릿가마을'이란 이 곳이 바로 나루터가 있었던 지역이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영도대교의 개통과 함께 나룻배의 정기운행이 멈추면서 이 지명도 점차 세인의 입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나릿가마을'은 현 영도다리 동쪽 봉래동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고리장터'란 지명은 영도에 있었던 국마장(國馬場)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멀리 신라시대 이래 조선조 말엽 무렵까지 우리 고장의 옛 호칭인 절영도 섬 태종대 기슭과 봉래산 기슭의 경사지 일대에는 말들을 방목하는 목장이 있었는데 3천 준마(駿馬)가 용동(聳動)하던 이 방목장에서는 '절영산명마(絶影山名馬)'로 알려진 명마가 산출이 되어 견훤이 태조 왕건에게 예물로 바친 일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 목장에는 관리권을 가진 조정에서 매년 한, 두 번씩 목자(牧者)가 와서 말들을 검사하여 쓸 만한 말에는 낙인을 찍었고, 낙인이 찍힌 말은 국가의 필요에 따라 징발 되었다고 한다. '고리장'이란 바로 말을 검사하는 곳에 붙여진 지명이다. 이 때 말들은 둘레에 둥글게 고리모양으로 말뚝이 쳐진 곳 안에 갇힌 채 검사를 받곤 했는데, 말이 검사를 받던 말뚝이 쳐진 고리 모양의 장소라고 하는 데서 '고리장터'란 말이 유래하였다 한다. 고리장터는 '환장터'라고도 하는데, 이는 아마도 말이 낙인찍힐 때 뜨거움에 못 이겨 환장하듯 몸부림친 곳이라는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선동과 봉래동 경계(봉래동 로타리 부근)가 바로 '고리장터' 자리이다.
'석탄고(石炭庫)마을'이란 청학1동 봉학초등학교 뒤쪽에서 천리교남성교회 뒤쪽 산등성이에 이르는 지역 일대를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이 곳은 문자 그대로 석탄창고가 있었던 지대이다. 이 곳에 이러한 지명이 붙여진 것은 1876년 부산항이 개항된 이후의 일본과 우리나라와의 정치적 관계와 관련이 있다. 부산항이 개항됨에 따라 일본인들의 세력은 부산에까지 급속히 확장되었고, 1885년에는 일본인들이 이 지역 일대가 포함된 영도 땅 약 5천평을 조차(租借)하여 사용하면서 그들은 이 곳에 해군 전용의 연료보급용 저탄장(貯炭場)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석탄고 마을'이라고 하는 이 곳의 지명은 이러한 사실(史實)에 연유(緣由)한다.
청학동 동쪽 바닷가에 있던 마을로서 부근에 어장이 발달하여 형성되었고, 주변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 한다. 이 바위를 '너섬바우', '넘섬바우(바위)'라 불렀고, 부근에 있는 마을을 넓고 큰 바위 즉 광암(廣岩)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사람들은 '광암마을'이라 불렀다 한다. '광암마을'은 현 청학2동 사무소 부근 일대에 있었던 마을이다.
현 청학2동 버스종점 부근에 있었던 바위에 붙여진 이름이다. 바위의 면적이 쌀 넉섬을 쌓아올린 만큼 넓고 크다 해서 쌀가마 단위를 넣어 '넉섬바위'라 일컬었다 한다. '넘섬바우' 또는 '넉섬바우'라고도 불렸던 이 바위에는 마을 부녀자들이 빨래를 널곤 했었다고 하는 설화도 전해진다.
'일산봉' 또는 '일산배기'는 현 청학2동 영도자동차학원이 있는 지역 일대에 붙여진 지명으로서, 이 곳은 지대가 높고 언덕이 많이 있었던 관계로 주변에서는 해뜨는 광경을 맨 먼저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져 '일산봉(日傘奉)'이란 지명이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곳은 '일산배기'라고도 불리는데, '일산배기'는 여기 있었던 언덕들에 붙여진 '일산벽'이 세월이 흐면서 사투리의 영향으로 '일산백이'로, 그리고 후에 '일산배기'로 불려진 것으로 보인다.
청학동 바닷가에 있었던 멸치어장이 발달했던 곳으로서, 여기 바닷가에는 낮고 개펄이 많아 썰물 때는 물이 군데군데 고여 조락한 곳이 많았다. 해서 '조락(潮落)마을'이란 지명이 유래했다 한다. 이 곳은 썰물이 되면 조수가 내려 드러난다고 하여 조수가 내리는 곳, 즉 '조내기'라고도 불렸다 한다.
이 곳은 원래 폭포가 있었던 곳으로서, '물아래 골짜기'라 불리던 것이 오랜 구전의 과정에서 '물아이골짜기' → '무라이골짜기'로 변하였다. 일명 '천하(天下)골'이라고도 한다. 현 광명고 옆을 흐르는 개천에서 청학2동 버스종점 부근까지에 해당된다.
영도의 옛 지명을 풀이한 기록들을 검토해 보면, '조내기'와 '조락마을'은 이명동지(異名同地), 즉 이름을 달리 하면서 두 개의 동일 지역을 나타내는 지명으로, 그리고 이명이지(異名異地), 즉 이름을 서로 달리 하면서 동시에 서도 다른 두 개의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도 사용된 듯 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조내기'의 경우 옛날 청학동 전체를 일컫는 지명으로도, 또는 조락마을과 동일한 마을(청학동 앞 바다에 있었던)을 일컫는 특정지역의 지명으로도 사용되었던 것이로 보이고, 조락마을은 위의 특정 지역을 일컫는 지명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청학1동 앞 바다에 있는 섬으로서 현재는 '갈매기섬'이라 불리는데, 옛날에는 '등며들섬'이라 불렸다. 확실치는 않으나 전해져 오는 대로는, 사람의 얼굴 들이 매끄럽지 못하고 무언가 돋아날 때 '머들머들'하다는 말을 쓰는데, 잔잔한 바다 위에 솟아 있는 섬을 얼굴에 돋아난 무엇에 비유하며 '머들섬'이라 했고, 여기에 '좋은 것'의 의미로 '덕'이란 한자를 붙여 '덕머들섬'이 된 것이 구전되면서 '덩머들섬' → '등머들섬' → '들며들섬' → '등며들섬'으로 변했다 한다.
옛날에 복어, 특히 졸복이 많이 잡혔다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현 영도구청 아래 미원상가가 있는 곳
동삼동 입구에 있던 마을로서 부근에 큰 바위가 있다 하여 '선암리'라 불렸다 한다. '덤'은 '바위'를 뜻하는 경상도사투리로서 '부피가 썩 큰 돌'을 의미한다 해서 '선덤', '선덤마을'로, 그리고 이것을 한자로 '선암(仙岩)마을'이라 불렀다 한다. 현 영도구청에서 의지의 꽃길에 이르는 지대에 붙여진 지명이다.
동삼동 상리에 있는 우물(샘)로서 봉래산 남동산록(南東山麓)에서 스며져 나오는 지하수에 붙여진 이름이다. '바가지새미'는 물이 바가지로 퍼내는 샘이라는 뜻에서 '바가지샘'으로 불렸고, 이것이 변하여 '바가지새미'가 되었다.
해양대학교로 들어가는 진입로 입구 쪽에 있는 갯가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은 옛날 대형 범선들이 정박하던 자리로서, 일제 때 군수물자를 싣고 온 배가 이 곳에서 짐들을 풀었던 것으로 알려져 온다. 보통 다른 지방에도 '세이기'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곶'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이기자갈'이란 동삼동 패총 유적 아래쪽으로서 어선들이 대던 곳이자 자갈밭이 있는 곳에 붙여진 지명이다. 현 동삼동 하리
'탱자나무골'이란 동삼동 상리마을에 있는 골짜기로서, 봉래산 남동쪽 기슭에서 발원하는 하천의 계곡이며, 이 곳에는 탱자나무가 많다 하여 이러한 지명이 붙여졌다.
조선조 말엽 1881년에 세워진 군사기지인 절영도진(絶影島鎭)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위치는 동삼동 중리 부산체육고등학교 자리로서 이 곳은 '진내(鎭內)' 또는 '토성진(土城鎭)'이라고도 불렸다. '토성진'은 이 곳에 토성이 있다 해서 붙여졌다.
옛날 어선이 정박하여 승선했던 사람들이 뭍으로 올라갔던 곳이라 해서 ‘오른장’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현 태종대 등대 밑 유람선 선착장
태종대 경내에 있는 곤포의 집 일대로서, 옛날 이 곳에서는 영도 다른 어느 곳에서 보다도 곤포(昆布), 즉 다시마가 많이 자랐기 때문에 이 곳에 '곤포'라고 하는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감연(甘淵) 또는 감정(甘井)은 동삼동 하리 서남쪽에 있었던 습지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는 물맛이 달고 시원한 못이 있어 국마장에 방목되었던 말들이 목이 마를 때 이 곳에 와서 갈증을 해소하곤 했다 한다. 이 곳은 감정(甘井)이라고도 불렸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