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흔을 목전에 둔,
우리 세대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방탄소년단의 노래도 한번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요즘의 대중가요에 관하여는 문외한이다.
60대가 주축인 합창단의 일원으로 노래는 즐기는 정도이다.
싱어송라이터 윤도경씨가 우리 동네 예술가이고 피켓들고 잠시 인사를 나누었던 인연이 있어
오늘 저녁 “쟁글쟁글” 연주에 억지로 참석했다.
자작곡과 선곡이 절규하듯 높은 음도 둔중하게 낮은 음도 아닌,
중간 음역의 노래로 채워진 것이 프로그램의 특징으로 느껴졌다.
보컬 윤도경씨가 높거나 낮은 음에 적합하지 않은 목소리이거나,
아니면 그만이 고집하는 개성의 표출이지 싶다.
우리는 얼마나 고음과 저음에 중독되어 있는가!
이전에 한두 번 본 복면가왕인가 하는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가수는
예외없이 피를 토하는 고음의 가창으로 청중의 가슴을 흔들었던 듯하다.
그런 가수의 가창에 비교하자면,
윤도경의 노래는 사랑의 아픔도 담고 있지만 담담하고 온화하다.
가사도 그러하다. 자연에서 은유를 빌려온다.--'바람이 앉은 자리’ 같이.
무대 뒤에 띄워둔 공연 주제 화면도 아카시아(아카시) 나무를 배경에 배치했다.
영도에 살면서 자연에서 위로를 받고 상처를 치유한 흔적이지 싶다.
한 노래에서는 버스 차창에서 보이는 낮익은 거리를 묘사한다.
분노하고 절망하며 불안한 심경의 표출이 아니다.
'결사투쟁’이라는 구호에 익숙한 우리에겐 너무나 차분할 지경이다.
복지관에서 일한다고 말하는 윤도경은 이미 10년차 가수임을,
그럼에도 무명임에 그다지 서러워하지 않는다.
담담한 멜로디와 가사가 공연 중간중간 그의 멘트와 결을 같이 하는 것이다.
“아버지 한테 드리는 노래”라는 멘트 후에는 눈물자욱이 맺힌다.
무명가수의 고된 삶을 지켜봐주는 부모님 생각 탓에 울컥했으리라.
그럼에도 동삼동의 슈퍼스타, 라이징 스타라고 희망을 꿈꾸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아마도 청중들은 대개 윤도경씨의 지인일지도 모르겠다.
공연 중에 “밴드 소개해줘요”하는 조카의 목소리가 퍼지더니,
“정해둔 순서가 있어, 삼촌이 좀 있다 소개할께!”하고 응답한다.
게스트 싱어가 “제 노래가 마치면 앵콜! 외치는 것 아시죠?”
라고 멘트하고 노래를 부른다.
지방의 소극장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지 싶다.
수만 명의 극성팬을 몰고 다니는 유명가수.
그들의 뛰어난 가창력과 무대에서 청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덕분일 터이다.
다만 그들은 0.1%, 우리 모두는 99.9%에 속하는 무명이다.
99.9%의 우리 무명인들은 연예기획사의 치밀한 조련으로 탄생하는 0.1%에 열광한다.
왜 지방소극장의 가족적인 분위기는 우리가 즐기는 공연이 되지 못할까.
내 삼촌이 열창하는 공연, 내 이웃이 담담하게 부르는 사랑과 아픔.
대중가요는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면서도 둔감하다.
먹고사는 사회 이야기는 제거되고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뿐이다.
대중가요는 대중들의 욕망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하나,
그 욕망 가운데 카타르시스 효과를 노리는 보수적인 측면을 대변한다.
0.1%는 여기에 최적화된 가요의 가수들이다.
당연한 일로 우리 99.9%는 자선가들이 아니다.
내 심장을 울리는 공연장을 찾아가 기꺼이 내 지갑을 연다.
그러나 그 울림이 조련된 마케팅 효과라면?
공연장 안내인은 공연 매뉴얼 대로 사진찍지 말라고 한다.
왜 누구나 찍어 인스타에 올리고, 유튜브에 올려 무명가수의 마을 공연이
혹시나 세계에 퍼지는 것을 막을까.
피를 토하는 가창력에 감동하는 대중들이 대다수이지만- 나도 예외는 아니다,
세계에는 담담한 노래를 즐기는 지구인도 분명 많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