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교동

영도는 신석기시대부터 선인들의 주거지가 되어 왔으나 임진왜란 이후 무인절도(無人絶島)로 바뀌었다.

영도가 무인절도로 된 원인은 임진왜란 후 왜적의 재침(再侵)이 두려워 주민들이 섬을 버려두고 타처로 이주하였는데다가, 그후 초량왜관의 개설과 더불어 왜관과 가까운 까닭에 사민책(伺民策)이 적극 장려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어업등의 이유로 소수의 주민들이 전체 백호(百戶)미만으로 산재하였는데 1881년 절영도진(絶影島鎭)이라는 첨사영(僉使營)이 세워짐에 따라 주민의 수가 차츰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대교동은 1914년에 북빈정(北濱町)이라 불리었다. 북빈정은 지금의 자갈치 부근을 남빈(南濱)이라 하는데 반하여 북쪽 바닷가의 마을이라는 뜻이었다.

1931년 영도대교가 개통되면서 영도대교의 이름을 따서 대교동(大橋洞)이라 불리었으며 해방 후 왜식(倭式), 동명(洞名)변경에 따라 대교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대평동

대평동은 원래 풍발포(風發浦)라 불리었다. 풍발은 바람이 이는 것처럼 기운차게 일어나는 뜻으로 도구의 지세에서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일제(日帝)때인 1931년 영도 서북쪽의 바다를 매립해 갑정(岬町)이라 하였다. 갑(岬)은 산허리 또는 바다로 뾰족 하게 내민 땅이란 뜻으로 매축되기 전의 지형적 특색에서 이름지어졌던 것이다. 대평동은 매립(埋立)당시 파도가 거칠고 바람이 강해 풍발포가 대풍포(大風浦)로 바뀌었다. 해방후인 1947년 왜식 동명정리때 파도와 바람이 잔잔해지길 바라는 뜻에서 풍(風)을 평(平)으로 바꿔서 대평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남항동

남항동의 옛이름은 석말(石末)추였는데 그 유래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85년 절영도 첨사(僉使) 임익준(任翊準)이 영도의 행정지명을 지을 때 동해(東海)는 본래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여 신선과 연관된 이름을 많이 지었는데 이때, 석말추도 신선이 사는 시내가 있다는 뜻의 영계(瀛溪)로 개명(改名)되었다. 1931년 영도대교 개통시 인근 바다를 매립한 뒤 왜식(倭式)동명으로 석견정(汐見町)이라 불리었다.

해방후 동명 개칭 작업때 이곳에 어업기지 및 수산관계기관이 운집해 있고 부산의 남항(南港)을 끼고 있다 하여 남항동(南港洞)으로 고쳤다.

영선동

영선동의 옛이름은 나릿가(津)였다.

이전의 부산 시청자리인 용미산(龍未山) 아래에서 영도로 향하는 배를 타면 닿는 나루가 바로 이곳이어서 "나루"라는 데서 연유되어 나릿가라 불리었다. 1885년 절영도 첨사(僉使) 임익준(任翊準)이 영도의 동명을 새로이 지을 때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동해에 있는 전설상의 섬 이름인 영주(瀛州)의 이름을 따서 영선(瀛仙)이라 지었다.

일제시대에는 이곳이 일본쪽을 보기에 알맞은 곳이라 하여 어영정(御影町)이라 불렀으며 해방후 다시 영선동이란 이름을 다시 찾게 되었다.

신선동

신선동에는 어느때의 묘당(廟堂)인지 알수 없으나 세칭 하씨당(河氏堂)이라는 당집이 있었다. 이 당집은 영도초등학교의 전신(前身)인 사립(私立) 옥성학교(玉成學校)시절까지 수림 사이에 있었으나 학교 부지 확장에 따라 훼손되었다. 이 하씨당은 원래 아씨당에서 연유된 것으로 풀이되는데 여자를 주신(主神)으로 모신 것이었다. 당(堂)의 주인이 여신선(女神仙)인 까닭에 1885년 첨사(僉使) 임익준(任翊準)이 영도의 지명을 정할 때 새로운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신선(新仙)이라 지었다 한다.

일제시대에는 북서쪽의 개펄을 매립하여 산수정(山手町)이라 불렀으나 해방 후 옛이름을 회복하여 신선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봉래동

영도는 하나의 큰 산으로 되어있는 섬으로 조봉(祖峯), 자봉(子峯), 손봉(孫峯)의 세봉우리가 있다. 이 산의 이름을 세칭 고갈산(姑竭山)이라 불러왔는데 절영도진(絶影島鎭)의 첨사(僉使)로서 가장 오래 재직한 임익준(任翊準)이 영도의 지명을 한문으로 고쳐 지을 때 이곳이야말로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여 산이름을 봉래산(蓬萊山)이라 명명하였다. 봉래동은 영도의 모든 동(洞)이다. 이 봉래산 아래에 흩어져 있으나 산세(山勢)의 주맥(主脈)이 닿는 곳이라 하여 이름지어진 것이었다.

일제때는 일본인들이 고갈산(沽渴山,먹이 마른산) 또는 고갈산(枯蝎山, 마른 도마뱀)이라 격하해 부르기도 하였는데 부산항을 마주한다 하여 항정(港町)이라 불리었으며 해방 후 봉래동이 되었다.

청학동

청학동은 선사시대의 조개무지(貝塚)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옛부터 선인(仙人)들의 주거지였음이 분명하나 임진왜란 후 영도의 공도책(空島策)에 따라 인적이 끊어졌다. 이후 어장(漁場)의 개발에 따라 뚜껍바구(蟾岩), 넉섬방우, 덩머들 등의 해안 지명이 생겨나고 이후 인가가 들어섬에 따라 조내기라는 지명도 얻어졌다.

조내기(潮落里)란 이곳의 바닷가는 낮고 개펄이 많아 썰물때는 물이 군데군데 고여있는 조락(潮落)한 곳이 많아 붙여졌다 한다.

한편 통신사(通信使), 조엄(趙嚴)이 일본에서 고구마를 가져와 이곳에서 처음 재배하여 내었다는 데서 조서(趙墅)를 낸 곳이라 하여 조내기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 조내기를 첨사(僉使) 임익준(任翊準)이 한문식 지명으로 바꿀 때 신선이 타는 학의 형상이라 하여 청학동이라 고쳤다.

일제시 청학정(靑鶴町)이라 하였다가 해방후 다시 청학동이란 이름으로 돌아왔다.

동삼동

동삼동은 이른바 상리, 중리, 하리의 3개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동삼동은 관내의 동삼동 패총, 아치섬 패총등으로 미루어 신석기시대부터 우리의 문화가 번성했던 곳이다. 임진왜란 후 영도가 빈 섬으로 남겨져 있을 때에도 동삼동만은 어장으로 어민들의 출입이 빈번했으며 영도 설진(設鎭) 이전에 가장 먼저 부락이 형성된 곳이기도 하다. 동삼 상리는 웃서발(上西跋)이라 하고 동삼 하리는 아랫서발(下西跋)이라 하여 어장(漁場)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라 동삼동 중리는 검정방우(黑岩)라 불렀으며 구진소(舊鎭所)부근은 동지(東地)라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지형 지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랫서발에는 팔준마(八駿馬)가 물을 먹었다는 감연(甘淵), 감지(甘池)또는 감정(甘井,甘訂)이라 부르는 못이 있어 영도에서 가장 신선한 연지(淵池)로 손꼽혔다.

영도에 목마장(牧馬場)이 생김에 따라 첨사 임익준은 웃서발은 상리로 개칭하였다. 이때 중리는 영도가 봉래산으로 신선이 사는 곳인데 이중 진소가 있던 동지는 바로 신서의 거처라고 영주(瀛州)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931년 동명 정리에 의해 동산정(東山町)이라 불리다 1947년 오늘의 명칭으로 바뀌어 불려졌다. 동삼동은 영도 동(東)쪽의 3개 마을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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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업데이트 :
2017-09-04 15:5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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